어제도 고찰을 해봤지만 역시 DS관계에 사랑이 없는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저 연애적 사랑과 별개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지요. bdsm에 사랑이 없는건 이상합니다. bdsm은 결국 누군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단지 계약이라면 우리는 왜 마음 아파하고 슬퍼합니까?
성향자와 ‘변바’의 차이는 뭘까.
나는 그 차이가 성향의 강도, 연차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플레이를 얼마나 강하게 좋아하는지, 얼마나 오래 성향판에 있었는지가 기준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건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이해하고, 또 그 욕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향 고찰은 단순히 내가 돔인지, 섭인지, 어떤 플레이를 좋아하는지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왜 이런 욕구를 느끼는지,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상대의 거절과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계속 들여다보는 과정에 가깝다.
이런 고찰이 부족하면 자신의 욕망을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기 쉬워진다.
“나는 돔이니까 이 정도 통제는 당연해.”
“섭이면 이 정도는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쌓이면 성향은 자기이해의 언어가 아니라, 욕구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고찰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좋은 성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말을 잘해도 실제 관계에서 상대의 경계와 동의를 무시한다면 의미가 없다.
결국 고찰은 시작점이고, 그 뒤에는 절제와 책임, 동의와 행동이 따라와야 한다.
나는 좋은 성향자란 자신의 욕망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그 욕망을 어디까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미성년자가 에셈을 하겠다며 뛰어드는 것도 막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 틈을 타 ‘교류’와 ‘교육’을 빙자해 미성년자에게 다가가는 성인의 태도 역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이모가 머리끄댕이라도 잡고 뜯어말려도 벽에 대고 소리치는 꼴이겠지만, 아직 앳된 미성년자라면 평범한 사랑도 해보고, 사랑에 데여도 보고, 사람을 보는 눈을 충분히 키운 뒤 시작해도 늦지 않다.
어른의 문턱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다.
인간의 계절에서 봄은
생각보다 빨리 소멸하니까.
부디 만개하기도 전에
아무에게나 밟히지 말기를.
연디와 디엣의 차이는
애정의 깊이가 아니라, 그 애정에 무엇을 기대하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디엣이라고 해서 애정이 얕은 것도 아니고,
연디라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이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디엣에서도 누군가를 아주 깊게 아낄 수 있고,
연디에서도 서로의 영역을 분명히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둘의 차이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나누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연디는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일상과 미래, 감정과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에 더 가깝고,
디엣은 성향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
서로가 합의한 범위만큼 깊이 연결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중요한 건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서로가 그 관계에 어디까지를 기대하고 있는지 아닐까.
같은 애정이라도,
바라는 관계의 모양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돔이 약한 모습을 보여도 권위는 유지될 수 있을까?
돔이라는 이유로 늘 단단하고 흔들림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티 내지 않고, 불안하거나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면 관계의 수직성이 무너질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권위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힘든 상태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상대에게 감정을 떠넘기지 않는 것, 실수했을 때 책임지고 사과할 수 있는 것, 필요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관계에서 맡은 책임을 놓지 않는 것.
오히려 이런 태도에서 더 큰 신뢰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돔도 결국 사람이고, 항상 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권위는 완벽함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면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걸까?
나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디엣에서 상대의 현실생활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까.
나는 돔이 상대의 생활에 관여할수록, 그만큼 더 큰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면이나 식사, 일정처럼 서로 합의한 영역은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관계, 직장, 금전처럼 상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까지 개입하려 한다면 단순히 “내가 돔이니까”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권한이 커질수록 판단은 더 신중해야 하고, 그 선택이 상대에게 미칠 영향까지 생각해야 한다.
수직관계는 상대의 삶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맡겨진 권한만큼 책임지는 관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좋은 돔의 개입은 상대의 삶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더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방향이어야 한다.
# Master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성향관과 가치관에 따른 글입니다.
BDSM에서 지배자의 자리에 서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깊은 신념과 성향적 철학이 존재할 것이라 믿습니다.
성향자라면 누구나 '내가 과연 이 성향을 내세워도 되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성향자라는 존재는 바로 그러한 성찰과 치열한 자문자답의 과정을 통과하며 비로소 한 명의 온전한 성향자로 빚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깊은 고찰의 연장선상에서 '마스터'라는 성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소위 마스터라 자칭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며 느낀 씁쓸한 단상들을 담담히 적어보려 합니다.
마스터라는 성향의 사유의 결론은 언제나 한 곳으로 향하곤 합니다.
마스터라는 성향은, 결코 스스로 먼저 목소리를 높여 내세울 수 있는 명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스터 역시 나를 온전히 믿고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는 '슬레이브'라는 존재가 있기에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마스터라는 자리는 스스로 먼저 명함처럼 내밀 수 있는 명칭이 아니라, 나를 따르는 슬레이브가 나라는 인간을 믿고 기꺼이 만들어주는 준엄한 자리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이 성향은 상대를 내 뜻대로 휘두르고 통제할 수 있는 가벼운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믿고 벼랑 끝에 선 상대의 영혼을 온전히 이끌고 감당해야 하는, 지독하리만치 무거운 책임을 부여받는 일에 가깝습니다.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우주를 통째로 내 어깨에 짊어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마주하는 수많은 마스터 분들에게서는 그러한 무게감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들은 상대의 성향이 슬레이브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태도부터 돌변하곤 합니다.
어제까지 지키던 최소한의 예의는 잊은 채 단숨에 말을 편하게 대하고 손쉽게 요구사항들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지배할 권리를 정식으로 부여받은 적도 없으며 상대의 인생과 상처까지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무게감 있는 약속을 단 한 번도 나누지 않은 채 말입니다.
성향이라는 이름이 덮치기 전에, 그 아래에는 엄연히 한 명의 사람이 숨 쉬고 있습니다.
아무리 피지배 성향을 지닌 슬레이브라 할지라도 그 역시 인간으로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고유한 가치관과 사고관 그리고 상처받기 쉬운 여린 마음을 지닌 존재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라는 존재의 모양을 바꾸고, 상대의 기준에 맞춰 나를 깎아내 가는 과정은 결코 당연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지난한 헌신입니다.
그런데 지배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이러한 피지배자의 노력과 희생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성향이 그러하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 라는 안일한 태도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회의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것이 성향의 본질이 맞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마스터라는 이름을 쉽게 내세우는 분들에게 저는 정중하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지배를 하기 위해, 여태껏 스스로가 쌓아온 모든 가치와 삶의 궤적을 단숨에 부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당신은 오직 그 사람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오랜 시간 목숨처럼 지켜온 신념마저 스스로 버릴 수 있습니까?
그토록 당신을 한없이 따르고자 온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슬레이브가 당신의 눈에는 그저 다루기 쉬운 가벼운 존재로 보이십니까?
그들의 순종이 결코 값싼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 순종을 받아내는 마스터라는 자리 또한 결코 쉬울 수가 없습니다.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그가 어떤 순간에 아파하고 어떤 순간에 안도하는지 그 내면의 밑바닥까지 온전히 알아가는 것
바로 그 끈질긴 이해로부터 지배가 시작되는 법입니다.
대체 어떠한 위치에서, 어떠한 시선으로 상대를 평가하기에, 그저 피지배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대단한 권력이라도 쥔 것처럼 온갖 특권만을 누리려 하십니까.
그것은 지배가 아니라 오만일 뿐이며, 성향이 아니라 다듬어지지 않은 권력욕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지배는 타인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위해 내 욕망을 자제하고, 상대의 슬픔과 무게를 기꺼이 내 어깨로 감당하며, 그 삶을 바른 길로 책임지는 고독하고도 숭고한 행위입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마스터라는 이름을 얻고 싶다면, 누릴 생각부터 하기 전에 내가 짊어져야 할 그 막중한 책임의 무게부터 깊이 헤아려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