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뭔가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임. 지금껏 좋았던 게 꿈이었고, 갑자기 찬물을 얻어맞아 잠에서 깬 것처럼 얼떨떨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물듦. 어려서 그런가,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름. 그럼 지금까지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거야? 나한테 해줬던 건 다 뭐고...?
붙잡아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물어봄. 처음 드레스사러 갔을 때 백화점까지 온 건?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이상한 거 살까 봐.구두 때문에 힘들었을 때 안고 나온 건? 걷기 힘들까 봐. 여행 가자고 할 때마다 자료 뽑아오고 일 미루고 같이 가줬던 건? 자료는 비서가, 여행은 가자 길래.
장난 치는 거 받아준 건? 쪼끄만 게 하는 짓이 귀여워서. 밤일은? 원하는 것 같길래. 그럼 당신은 나를 원한 적 없어요? 딱히.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굳이 뭐라고 생각해야 하나. 정략결혼이고 쇼윈도인데. 괜히 물어봤어. 상처만 덕지덕지 달고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옴.
멍하니 씻고 잠옷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도 아무 생각도 안 남. 좋았던 게 꿈인지, 지금이 꿈인지 모르겠어. 들은 말이 흉터로, 눈에 보이는 걸로 남는 게 아니라서 더. 들었던 말만 계속 곱씹고, 되뇌이는 게 스스로를 더 상처주는 것도 모르고 생각을 거듭함.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음. 끅끅 숨 넘어갈 정도로 진정도 주체도 안 되는데 와중에 우는 소리는 내고 싶지 않아서 참고 참다가 떨리는 숨 뱉어내고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아서 그마저도 놔둠. 지금까지 나눴던 게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도, 그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너무 서러워
그래도 우리 같이 보낸 계절이 있는데. 그 시간이 있는데. 살 맞대고 잠들고, 아침을 열고, 마주보고 대화하고, 여행도 다녀오고, 모든 게 그저 내가 원했기 때문에, 남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걸 해줬다는 말이 가슴에 콕콕 박혔음. 그걸 말하는 목소리, 표정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는 것때문에 더.
울다가 지쳐 잠들고, 점심 때가 넘어서야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났음. 침대에 앉아서 눈이 왜 안 떠지는지 생각하다가 그게 꿈이 아니란 걸 다시 깨닫고 일어나자마자 울었음. 찬물로 세수하고 얼음 주머니 올려두는데 얼음이 녹으면서 흐르는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게 계속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림.
생각해보면 그래. 이명헌이 먼저 찾아와준 적은 없었음. 붙어있는 걸 밀어내지 않았을 뿐이지. 장난도 먼저 걸면 응해줬던 거고. 그걸 증명이라도 해주듯, 그 일 이후로 집에서 이명헌을 본 적이 없었음. 항상 오는 소리에 송태섭이 나갔고, 쫓아다니면서 종알종알 얘기한 것도 들어는 줬음.
나는 사랑이었는데, 당신은 아니었던 거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데도 궁금하지도 않은지 이명헌은 방 문 한 번 두드려보지 않았음. 처음 이 집에 와서 느꼈던 외로움은 비교도 되지 않았음. 그때는 슬프진 않았으니까. 힘들지 않았으니까.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런 생각 안 하게.
며칠이 지나도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없었음. 이젠 눈물도 다 말랐는지 울지도 않았음. 그렇다고 웃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랜만에 엄마 보고 싶어서 집에 말도 없이 나옴. 이명헌은 자고 있겠고, 고용인들은 모두 출근 전인 이른 새벽 그냥 핸드폰 지갑만 들고 택시타고 집에 왔음.
집에 와서 몇 년 안 눌렀다고 어색해진 비밀번호 누르고 조심히 들어갔음. 가족들은 다 잘 시간이라 집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안방 문 열고 자고 있는 엄마 품으로 들어감. 이불 안으로 꾸역꾸역 몸 밀어 넣고 엄마 끌어안음. 자다가 깨선 놀라시는데 다시 울음 터지니까 등 토닥토닥하면서 안아줌.
한참 울다가 오랜만에 집밥 먹음. 눈도 못 뜨고 밥 먹는데도 아무것도 안 물어봐서 더 미안함. 밥 먹고 한 숨 자. 네 방 아직 안 치웠어. 고개 끄덕이구 밥 먹고 있으면 고등학교 다니는 송아라 일어나서 씻으러 나오다가 눈 크게 뜨고 봄. 근데 언니 꼴이 심상치 않은지 슬금슬금 씻으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