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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티 봇 부활
유행을 해석학적인 기준선으로 삼음으로써 발자크는 사회학적 총체성을 상상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상품의 혹은 사람의 자취를 탄생에서 죽음까지 따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회학적 응축의 예로서 <인간희극>의 시장 혹은 증권거래소는 발자크의 살롱이다.
발자크에게서 심각하게 반동적인 점은 그의 보수적 경향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약탈자의 전설과 공모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황금에 대한 빌어먹을 탐욕에 대한 분노는 부르주아적 변명의 마르지 않는 원천인 것이다" 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옳다
소설 형식은 보편적 역사의 발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일상 생활의 관점에서 인식한대로 재구성한다 더욱이 소설은 '특수성'의 삶을 확장하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보편적 역사를 깔때기로 붓듯이 일상의 영역으로 집중시킨다
헤겔은 이렇게 썼다. "이 위대한 사람은 단지 자신의 열정, 자신의 자유의지만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이것이 그들의 페이소스이다"
빌헬름 마이스터를 대표적이면서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젊음 그 자체이다. 젊음, 혹은 유럽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형태의 젊음은 우리 근대 문화에서 '삶의 의미'를 담는 시기가 되었으니, 젊음은 메피스토텔레스가 파우스트에게 준 첫 선물이기도 하다.
과거에 어울렸던 동료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이상 편안하지 않으며, 새로운 부르주아환경에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주인공은 불현듯 그의 위치가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잭 런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 순간 그는 알았고, 더이상 알지 못했다)익사한다
괴테의 포부, 스탕달의 야망, 발자크의 환상, 디킨즈의 기대, 엘리엇의 갈망- 이 모든 감정들은 '불안이라는 근대의 악'에 대한 단호한 이중부정으로 씌어진 것이다. 교양이나 예술로 승화된 경우에도 자기 억압은 또다른, 진정으로 분명한 배제로 귀결된다.
질문과 답 사이에 근대적 젊음의 짧은 궤적이 펼쳐진다. 두 가지 사회적 모델의 가능한 타협을 탐구하는 부르주아적 삶의 실험의 계절이.
이 교양소설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일을 벗어난 후엔, 부르주아란 무엇인가? 그는 어떤 일을 하는가? 그는 어떻게 사는가> 그리고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옛것과 새것의 기이한 혼합이며, 유동적이고 단편적인 정체성이다
즉 19세기 부르주아지는 귀족적 생활방식의 어떤 면들을 자신의 문화적 형성에 맞게 재활용했으며, 교양소설이란 그것대로 이러한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반영하는 상징적인 형식이었던 것이다.
두 계급의 조우, 사실상의 '결혼'은 프랑스 혁명에서 생성된 결렬을 치유하고, 구체제와 새로운 체제 사이의 연속성을 상상해내는 방법이다. 그것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적 구조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화해시키려는 시도'이다.
<감정교육>에 와서야 이러한 지배계급의 겹치기가 사라졌고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플로베르의 이 소설은 위대한 유럽 교양소설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계몽된 지주들의 소모임이 양자로 삼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이야기이며, 칩사이드에서 펨벌리로 가는 엘리자베스 베넷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고, 스탕달의 쥘리앵의 이야기이며, 발자크의 뤼시앵에 관한 이야기이고 제인 에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흐친이 표현했듯이, "두 시대의 경계에서, 그리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전환점에서" 교양소설은 두 사회계급-부르주아와 귀족-사이에, 그리고 그 두 계급 사이의 전환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정치적인 삶으로부터 물러서는 특징으로 인해 소설은 콩스탕이 명확하게 규정했듯이 근대인의 자유의 한 측면이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교양소설에서 유럽의 역사는 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단지 행위의 지평일뿐이다. 공적인 삶이 폭발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시기에조차 소설은 사회적 갈등의 폭풍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끈질기고도 현실적인 능력으로, 단호하게 사적인 영역을 선택했다.
즉 실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좀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들 소명 말이다. 권력관계와 심지어 그 권력관계가 양산하는 폭력을 좀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들 소명과 함께.
사회적 응집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개인의 실존을 따분한 것으로 만들 수 있 상징적 과부하를 초래한다. 그리고 문학은 이러한 긴장을 이완시키는 것을 도와준다.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소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후에 온다'라는 말이 이미 존재하고 있느 것을 반복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역사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은 윤리적 장애와 개념적 혼란,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